choarewrite

Rewrite the Stars

‘별을 다시 쓰다’라는 말에는 ‘별에 새겨진 운명을 다시 쓰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과 삶, 사람에 관한 글과 시를 씁니다. 지나간 순간과 남겨진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며, 다 안다고 믿었던 것들에 새로운 문장을 건넵니다.

01가족

엄마, 아버지, 아이, 그리고 비운 방

명절에 현관을 정리하다감각형

아버지 구두를 집어 들었다. 뒤축 바깥쪽만 비스듬히 닳아 있었다. 내 운동화 옆에 나란히 놓았다가 구두 코를 문 쪽으로 돌려 두었다. 거실에서 아버지가 리모컨을 찾는 소리가 났다. 나는 구두를 다시 들어 닳은 쪽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시곗줄 구멍이 하나 모자랐다.감각형

버스를 기다리며 손목을 들 때마다 시계가 손등 쪽으로 미끄러졌다. 몇 시인지 보고, 조금 있다 또 봤다. 약속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다. 세 번째쯤부터는 바늘을 읽지 않고 유리에 난 오래된 흠집을 엄지로 문질렀다. 버스가 두 대 지나갔다.

엄마와 시장에 갔다.감각형

엄마는 늘 나보다 반 걸음 앞에서 사과를 고르고 값을 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내 팔을 잡았다. 신호등 앞에서 먼저 발을 떼려다 엄마 발이 아직 연석 위에 있는 걸 봤다. 초록불이 깜박였다. 나는 엄마 손 위에 내 손을 얹고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열쇠를 돌려주기 전에 한 번 더 들어갔다.감각형

신발을 신은 채 현관을 넘는 건 처음이었다. 손이 먼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딸깍, 불이 켜졌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 위로 형광등 빛이 끝까지 닿았다. 한참 서 있다가 스위치를 내렸다. 나가려다 돌아서서 꺼진 스위치를 손끝으로 한 번 더 눌러보았다.

엄마가 생선 가운데 토막을 내 밥 위에 올렸다.감각형

나는 가시를 발라 그걸 아이 밥그릇으로 옮겼다. 아이는 반쯤 먹고 숟가락을 놓았다. 엄마는 꼬리 쪽을 뒤적이고 있었다. 나는 아이 그릇에 남은 살을 젓가락으로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02말과 행동

쓰다 지운 답장, 행동 위에 써 붙인 문장, 듣는 척한 시간

친구가 이직 얘기를 하다 잠깐 말을 멈췄다.감각형

나도 작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입을 반쯤 열었는데, 친구가 다시 이어서 말했다.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한참 서 있었다고.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신호가 몇 번 바뀌었는지 세다가 그만뒀다고 했다. 나는 작년 얘기를 끝내 꺼내지 않았고, 거기서 왜 서 있었는지도 묻지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렵다고, 그래서 사랑은 행동으로 안다고 말해왔다.사유형최종본

사랑한다는 말은 흘려듣고,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사람은 오래 기억했다. 그런데 그 우산이 사랑이라고 정한 건 누구였나. 그 사람은 그날 그냥 근처에 있었을 수도 있다. 나는 행동을 믿은 게 아니라 행동 위에 내가 써 붙인 문장을 믿었다. 남의 말은 가볍다면서 끝까지 붙든 건

예쁘다고, 이건 꼭 쓰자고감각형

몇 번을 말했던 그릇이었다. 손님상에 내려고 꺼내 뒤집으니 바닥에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삼천구백 원, 작년 봄 날짜.

보내지 않은 말은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믿었다.사유형

날 선 문장을 삼키는 게 어른의 일이라고. 그런데 지운 문장을 하나씩 떠올려 보면 상대를 다치게 할 말은 거의 없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 그날 왜 먼저 갔냐는 말. 지워진 건 대부분 나를 드러내는 말이었다. 나는 그 밤을 참았다고 기억한다. 겁이 났다고 적으면 진 밤이 되고 참았다고

03잃은 것과 남은 것

맞는 문이 없는 열쇠, 하나만 쓰는 그릇, 지났다고 말한 일

건조대에 그릇 하나가 엎어져 있다.감각형

아침에 쓴 것이다. 찬장에는 같은 무늬 셋이 포개져 있다. 넷이 한 벌로 산 그릇이다. 저녁에 건조대의 그릇을 뒤집어 들었다. 바닥에 물이 한 방울 남아 있었다. 닦지 않고 밥을 펐다.

연락처를 정리하다감각형

그 이름에서 엄지가 멎었다. 대화창 맨 아래에 내가 보낸 말이 그대로 있었다. 괜찮아, 이제 다 지난 일이야. 그 뒤로는 아무것도 오가지 않았다. 지우기를 눌렀다가 취소를 눌렀다.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현관 앞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감각형

맞는 열쇠를 찾다가 더는 맞는 문이 없는 열쇠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그 집 계단이 몇 칸이었는지 아직 셀 수 있다. 고리를 벌려 열쇠를 빼려다 엄지손톱이 조금 들렸다. 고리를 다시 닫고 내 집 문을 열었다.

퇴근길 편의점에서감각형

늘 사던 두 개 묶음 요거트를 집었다. 계산대 앞에서 하나를 떼어 돌려놓으려다 비닐이 잘 찢어지지 않아 그냥 들고 나왔다. 냉장고 문 안쪽 칸에 넣고 하나만 꺼내 먹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주에도 그 칸은 비우지 않았다.

소개

글마다 씨앗이 있습니다. 씨앗 한 줄에서 사유형과 감각형 두 판을 쓰고, 마음에 드는 판을 골라 고칩니다. 판을 바꿔 읽으면 같은 씨앗이 다르게 자라는 자리가 보입니다. 최종본으로 표시된 글만 고른 글이고, 나머지는 아직 고르는 중입니다.